1 백양산의 친구 - 까마귀 - 선의 블로그
에세이 / / 2025. 3. 6. 00:02

백양산의 친구 - 까마귀

 

 

 

 

 

백양산의 친구, 까마귀

부산의 중심에 우뚝 솟은 백양산은 사계절 내내 다양한 얼굴을 가진다. 봄에는 벚꽃과 철쭉이 만개하고, 여름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준다. 가을이면 단풍이 붉게 물들고, 겨울에는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푸른 소나무가 꿋꿋이 자리를 지킨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랜 친구를 만났다. 바로 까마귀다.

 

첫 만남

처음 까마귀를 본 건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앞산에 땔감을 하러 갔을 때였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던 중, 검은 그림자가 우리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갔다. "까악!" 하고 울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까마귀는 불길하다고 하잖아?" 내가 조심스레 말하자,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까마귀는 굉장히 영리한 새야. 일본에서는 행운을 가져오는 새라고도 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옛날엔 좋은 징조로 여겨졌어."

나는 그날 처음으로 까마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번쩍이는 눈, 윤기 나는 깃털, 그리고 날렵한 몸짓. 왠지 모르게 멋있어 보였다. 그 후로 백양산에 갈 때마다 나는 까마귀를 찾기 시작했다.

 

서로를 알아가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혼자 백양산에 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등산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사소한 다툼, 성적에 대한 고민, 부모님의 잔소리.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산길을 오를 때면 까마귀가 나를 반겨주었다.

처음에는 내가 오는 걸 우연히 본 것이라 생각했지만,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타나면 꼭 같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고, 때로는 나를 따라다니듯 근처에서 날아다녔다.

"혹시 넌 나를 기억하는 거야?"

나는 농담처럼 말을 건넸지만, 까마귀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까악!" 하고 울었다. 이상하게도 그 울음소리가 위로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나는 까마귀를 '친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비밀을 공유하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백양산에 가는 횟수는 줄었지만,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여전히 산을 찾았다. 대학 입시를 앞둔 어느 가을날, 나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백양산에 올랐다. 단풍잎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걷다 보니,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악!"

고개를 들어 보니, 까마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나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너무 불안해.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겠어."

까마귀는 내 말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갑자기 날개를 활짝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러더니 내 앞에서 원을 그리며 몇 바퀴 돌았다.

"하늘을 봐?"

나는 까마귀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맑은 가을 하늘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순간, 마음속 불안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꼈다. 까마귀는 마치 "괜찮아. 넌 잘해낼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순간

성인이 되고, 취업 준비로 바쁠 때도 가끔 백양산을 찾았다. 그리고 까마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산을 오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까마귀가 나무 아래에서 날지 못한 채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한쪽 날개가 다쳐 있었다. 누군가 던진 돌에 맞은 걸까?

"괜찮아. 내가 도와줄게."

나는 조심스럽게 까마귀를 품에 안았다. 처음엔 날아가려고 몸부림쳤지만, 이내 힘이 빠진 듯 얌전히 있었다. 나는 급히 근처 동물 병원으로 향했다. 다행히 뼈에는 큰 이상이 없었지만,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동안 나는 집에서 까마귀를 돌보았다. 물과 먹이를 주며 지켜보니, 정말 영리한 새였다. 이름을 부르면 고개를 돌렸고, 손을 내밀면 경계하면서도 서서히 다가왔다.

"넌 참 신기한 새야."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까마귀의 날개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나는 백양산으로 돌아가 녀석을 풀어주었다.

"이제 다시 자유야."

까마귀는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힘차게 날아올랐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서 한 바퀴 돌며 날아다녔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듯이.

 

변하지 않는 친구

시간이 흘러 나는 사회인이 되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백양산을 찾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가끔 힘들 때면 여전히 그곳을 찾았다.

어느 날, 오랜만에 백양산에 올랐다. 예전처럼 천천히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까악!"

고개를 들자, 까마귀 한 마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친구."

까마귀는 다시 한 번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언제나 여기 있었구나."

백양산의 까마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든 내가 돌아오면 반겨줄 것만 같았다.

 

 

 

 

  • 네이버 블로그 공유
  • 네이버 밴드 공유
  • 페이스북 공유
  • 카카오스토리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