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령사, 벚꽃, 두릅, 달롱개 나물
봄의 전령사
겨울 끝자락이 길게 이어진다고 생각했던 날들이었다. 회색빛 하늘과 싸늘한 바람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문득 아침 공기에서 낯선 따뜻함이 스며드는 걸 느꼈다. 누군가가 내 귓가에 속삭이듯, “이제 겨울 끝났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봄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발밑에 와 닿아 있었다.
햇살부터 다르다. 겨울 내내 유리창 너머로 멀고 차갑게만 느껴지던 햇살이 어느 순간 부드럽게 방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유난히 밝고 환해진 창가에서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보며, 나는 봄이 틀림없이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햇살이 내 손등을 감싸고, 얼굴에 닿을 때면, 겨울 동안 잊고 있었던 따스한 온기가 마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집 앞 논두렁을 따라 걸으면 매서운 바람 대신 한결 부드러워진 공기가 뺨을 스친다. 여전히 바람은 불지만, 이제는 그 속에 찬 기운 대신 묘하게 향긋한 냄새가 섞여 있다. 바람에 실려 오는 흙냄새, 그리고 그 속에 섞인 쑥 냄새. 고개를 숙여 논두렁이나 밭둑을 살펴보면 겨울 동안 숨어 있었던 초록빛 쑥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손끝으로 살살 쑥을 뜯으면, 특유의 쌉싸름하고 구수한 향이 손바닥에 스며든다. 어릴 적 어머니가 봄마다 쑥떡을 쪄주던 기억이 불쑥 떠오른다. 커다란 가마솥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어머니 손끝에서 갓 찐 따끈한 쑥떡이 나오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진다.
조금 더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뭇가지마다 작은 매화 꽃망울들이 보인다. 아직 완전히 피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하얗고 작은 매화꽃은 마치 겨울을 견디고 피어난 첫 인사 같아서,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진다. 매화는 참 담담하다. 찬 바람 속에서도 한 점 미소처럼 피어나, 사람들 마음을 조용히 깨운다. 내가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 마을 담장 위에도 매화나무가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그 가지 위로 하얀 꽃들이 피어나고, 마을 어르신들은 ‘봄이 왔구먼’ 하고 웃으며 담배 한 모금씩 물곤 하셨다.
벚꽃은 매화보다 조금 늦게 피지만, 그 화사함은 단연 압도적이다. 골목길 따라 늘어선 벚나무들은 한꺼번에 연분홍 꽃잎을 터뜨려, 마치 하늘 아래 분홍색 구름이 내려앉은 것처럼 마을을 물들인다. 벚꽃 아래서 친구들과 장난치며 놀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바람이라도 한 번 세차게 불면, 꽃잎들이 소나기처럼 흩날렸고, 그 속을 뛰어다니며 우리는 웃고 또 웃었다.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꽃잎 하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도 계절을 품은 시간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산비탈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두릅나무들이 보인다. 겨울 동안 앙상했던 가지 끝에서 연둣빛 새순이 움튼다. 두릅은 정말 소박하지만 귀한 봄의 맛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산에서 두릅을 따 오시던 기억이 난다. 그 작은 새순 하나하나가 얼마나 연약하고 귀한지 알기에, 손수레 한가득 두릅을 가져오신 아버지의 땀방울이 더 소중해 보였던 날들이다. 된장에 살짝 찍어 한 입 베어 물면, 쌉싸름하면서도 입 안에 퍼지는 향긋함에 봄이 입 속까지 가득 번지는 듯했다.
논두렁, 밭둑, 산자락 곳곳에는 이름 모를 산야초들도 저마다 자리 잡고 있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땅속에서 스르르 올라온 이 작은 풀과 꽃들도 봄의 전령사다. 어린 시절 할머니 손잡고 들판을 거닐며 “저 풀은 먹으면 안 되고, 이 풀은 쌈 싸 먹으면 된다”던 말씀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렇게 조용히 피어난 산야초들 속에서, 고향의 품처럼 다정한 자연의 품을 다시금 느낀다.
봄의 바람은 말이 없다. 다만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간질이고, 먼 기억을 끌어올린다. 어릴 적 고향 마을에서 맞던 봄날의 냄새, 논두렁에 핀 민들레와 쑥의 향기, 햇살 아래 반짝이던 벚꽃잎,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던 두릅 바구니까지. 바람은 그 모든 기억을 데리고 다시 찾아와, 오늘도 나를 아련하게 감싼다.
봄은 늘 그렇게 조용히 찾아와,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 겨울 내내 굳어 있던 마음을 천천히 녹이고, 우리가 잊고 지낸 것들을 조용히 일깨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추어, 바람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작은 쑥 한 포기, 매화 한 송이, 두릅 한 줄기, 그리고 바람 속에 스며든 햇살까지, 모든 것이 고맙고 아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렇게, 봄은 오늘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겨울 지나고, 다시 꽃이 피었구나. 너도 잘 견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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